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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asa

casa de muñecas

​제1장
인형의 집

1.

 

 “나 왔어.”

 “오늘 일은 어땠어?”

 “정신없이 바빴지. 그래도 오늘은 아무도 안 죽었어. 뭔가 타는 것 같은데?”

 “잘 익어 가고 있는 거야.”

 때마침 오븐 타이머가 울리고, 목소리는 다시 부엌 안쪽으로 멀어졌다. 알레한드라는 집 열쇠를 거실 탁자에 내려 놓고 귀고리와 팔찌를 차례로 풀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화장대에는 장신구 보관함이 아침에 출근할 때 꺼내둔 위치 그대로 놓여 있었다.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가방을 선반에 올려두고, 스타킹을 벗고 머리를 풀면 비로소 퇴근했다는 실감이 났고, 잔뜩 경직되었던 몸의 긴장도 풀렸다.

 거실로 나가자 고소하고 짭쪼름한 냄새가 풍겨져 왔다. 예민하지 않은 미각으로 고향의 맛을 완벽히 재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요리는 인접한 국가의 퀴진을 공략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오늘의 메뉴는 버섯과 양파가 들어간 크림 리소토였다. 정통성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식사에서는 프랜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의 맛이 났다. 하지만 갓 익힌 쌀과 양송이는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웠고, 그것만으로도 진실되게 감사할 수 있었다.

 “구직 활동은 잘 되어 가?”

 “불경기라서 그런지 쉽지 않네.”

 “너무 조급해 하지 마.”

 물론 그들은 닷컴 버블이나 리만 브라더스 사태가 삶의 기반을 뒤흔든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다만 넵투누스의 가호가 사라진 뒤 서로 적대하고 반목하는 세상에 적응해 나갈 뿐이었다.

 핌리코의 더블룸 아파트는 인근 대형 마트와 농부들이 직접 생산물을 가지고 나와 파는 시장 모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애스턴 마틴과 메르세데스 벤츠가 달리는 도로는 반듯했고 거리마다 잘 가꿔진 가로수가 보도에 응달을 드리웠다. 금융 회사나 다국적 기업에 재직하는 젊은 부부가 다수 거주하는 구역이었다. 월세는 아슬아슬하게 홀로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두 세계의 동맹 이후로, 환율이 폭등한 화폐는 오히려 갈레온이 아니라 파운드였다. 인류의 절대 다수는 거의 강박적인 수준으로 숨겨져 왔던 세계에 무관심했다. 알레한드라는 늘 그 유난스러움이, 저들만이 유별하고 중대한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외부인으로부터 감추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마법사들의 선민 의식이 꼴불견이라고 여겨 왔기에, 그린고츠의 환전소에서 같은 무게의 금으로 등치되는 지폐의 두께가 나날이 줄어들어도 별 위기감 없이 순응했다.

 식탁 한 구석에는 오늘자 조간 신문이 반듯하게 접혀 놓여 있었다. 요 며칠간 언론의 헤드라인은 노동당 출신 전 총리의 비자금 소재지로 도배되었다. 이어지는 기사 내용은 온통 제3의 길이 어떻게 대처리즘의 후과를 수습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다루었다. 이민자도 아닌 외국인 노동자에게 선뜻 일자리를 내어 줄 인심은 당분간 이곳 런던에서 찾아보기 힘들 성싶었다.

 다시 지팡이를 드는, 확연히 간편한 방법을 권할 수도 있었다. 살짝 잡아서 끌어당기기만 해도 이분되지 않은 세계의 불분명한 선을 건너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레한드라는 묻지 않았고 그 역시 그녀가 매일같이 출퇴근하기 위해 현관을 나서지 않고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체했다.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 거리를 모아 개수대에 갖다 놓으며 알레한드라가 가볍게 제안했다.

 “소파를 새로 바꿀까 봐.”

 “왜? 지금 것도 멀쩡한데.”

 “넌 겨자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레하, 소파는 앉으라고 있는 거지. 보통의 남자들은 거기서 대단한 심미성을 기대하진 않아.”

 “그래도 네 마음에 들면 좋겠어.”

 금방이라도 왜냐고 물을 것처럼 에두아르도가 돌아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2.

 

 문틈이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맹수처럼 잠복해 있던 불청객이 베개를 날려 보냈다. 방의 주인은 얼굴을 정통으로 겨냥한 발사체를 날렵하게 낚아챘다.

 “그리핀도르의 주전 추격꾼께서 드디어 행차하셨네.”

 “알레호.” 시야가 가로막힌 채로도 방을 무단 점거한 이가 사촌임을 알아차린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에두아르도가 베개를 원래의 자리를 향해 도로 던졌다. 개인실의 비좁은 면적에 맞지 않게 난폭한 위력이었다. 가파른 궤도의 끝에서, 미드필더의 날카로운 패스를 받아 득점을 시도하는 포워드처럼 알레한드로가 그것을 민첩하게 받아 안고는 느물거리며 다리를 뻗었다. 알레한드로는 어릴 적부터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성장의 폭은 나이가 들어서도 줄어들지 않아 여전히 사지가 에두아르도보다 기름했다. 어깨 아래에 베개를 깔아 받치고 모로 기대 누운 그는 하인이 가져올 벨로네와 석류를 담은 주석 쟁반을 기다리는 고대 로마의 데카당트처럼 거만했다.

 “연습이 좀 길어졌어.”

 “새 주장이 또 히스테리야?”

 말총머리를 조여 묶은 두 학년 위 선배는 유독 꼬장꼬장하고 엄격했다. 뻣뻣한 막대 같은 성미일수록 손쉽게 꺾인다는 법칙을 알레한드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상념에 잠겨 입가를 매만지자, 에두아르도가 유니폼을 벗어 옷걸이에 걸면서 부정했다.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촌을 곁눈질하며 그가 벽에 빗자루를 기대 세웠다. 그 사이 알레한드로는 나름의 판단을 내린 듯했고, 에두아르도에게는 그 영역에 개입할 권한이 없었다. 그럴 때는 혈육이라는 증표마저도 무용했다.

 “씻으러 가냐?”

 “어.”

 “그 전에 빗자루 타자.”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줄곧 비상과 하강을 반복하다 몇 번은 잔디밭에 구르며 피로로 녹진해진 채였으나, 권유를 듣자 금세 활력이 돌았다.

 교내 스포츠 팀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어른들을 졸라 변변한 님부스를 장만한 에두아르도와 달리 알레한드로에게는 여지껏 빗자루가 없었다. 사촌은 스포츠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역시 데르비 세비야노가 기른 안달루시아의 소년이었고 곧잘 공을 쫓아 달리고는 했으나, 필드 내에 적용되는 복잡한 룰과 매너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규칙에 순응하고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건 오로지 그로부터 취할 이득이 존재하는 선까지만이었다. “안 해. 우습잖아.” 입단 테스트를 신청하지 않을 거냐는 질문에 언젠가 그가 대답했었다.

 그러나 다음날 바로 어디선가 괜찮은 기종의 탈것을 마련해 와 밤하늘에 동행할 의사를 묻는 이도 그였다. 빗자루의 출처는 미상이었고 고정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구할 손속이 알레한드로에게는 있었다.

 에두아르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갈아입을 옷 대신 빗자루를 챙겨 들자 알레한드로가 씩 웃으며 침대 밑으로 손을 뻗었다. 삐걱거리는 철제 프레임 아래에 에두아르도의 님부스와 같은 모델이 숨겨져 있었다. 새것이라기에는 이미 사용감이 심했고, 막대 끝에 금빛 잉크로 누군가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교내에 빗자루를 소유하고 있는 학생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에두아르도는 금세 알파벳을 조합해 특정인의 얼굴과 연결할 수 있었다. 물어도 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들 사이에 어떤 거래가 이루어졌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브리튼섬 북부의 고지대에는 밤이 이르게 찾아왔다. 해가 저물면 낮 동안 가려졌던 서슬퍼런 청백색 빛이 백야처럼 사위를 밝혔는데, 태양과 불온한 위성의 완전한 교체가 이루어지기 전의 찰나에는 만물의 윤곽이 잠시간 흐려졌다.

 두 사람은 그림자극의 배경처럼 검게 뭉개진 산림을 스치고 교정을 넓게 한 바퀴 돌았다. 에두아르도는 습관적으로 고도를 높이고 쏜살같이 나아가갔는데, 그에 반해 알레한드로는 지형지물 가까이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기를 즐겼다. 한동안은 평행 상태를 유지하던 그가 예고 없이 방향을 틀어 호수 위로 전진했다. 에두아르도는 사촌의 경로 이탈을 뒤늦게 인지했고, 그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속력을 키웠다.

 먼저 호수에 도달한 알레한드로는 태평하게 손깍지를 껴 뒤통수를 받치고 허리를 젖혀 빗자루에 몸을 누인 채로 그를 기다렸다. 멀리서 에두아르도가 탄환처럼 돌진해 왔다.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위아래로 이 미터 남짓한 간격이 있었다. 점처럼 작았던 인영이 선명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 알레한드로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손을 머리 위로 뻗었다. 그리고 두 소년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순간에, 빗자루를 딛고 뛰어올랐다.

 발밑에서 검푸른 수면이 요동쳤다. 사냥의 기회를 포착한 이름 모를 생물이 먹잇감을 놓치고 신경질적으로 지느러미를 휘저었다. 에두아르도는 그의 님부스를 한 팔로 껴안아 매달리듯 지탱하고는 알레한드로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정교한 설계였든 천운이었든,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춘 것까지는 좋았으나 덜 여문 몸은 형제의 무게를 버틸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놓치겠어!”

 “괜찮아, 카이덴.”

 매달린 소년은 손바닥이 죽 미끄러지는데도 빙글거리는 미소만 태평히 띄웠다. 이윽고 하체로 반동을 주더니 남은 팔로 기어이 자루를 움켜쥐었다. 매끄럽게 상반신을 뒤집어 올라타기까지의 동작은 곡예보다는 격정적인 바일레와 근사했다.

 은신하거나 여유를 만끽하기에는 가늘고 위태롭고 불편한 나무 자루 위에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았다. 알레한드로가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 에두아르도 역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스코틀랜드의 산중에서 몸을 그 리듬으로 다룰 수 있는 이는 둘뿐이었다.

 다른 누군가는 필요치 않았다.





 

3.

 

 “널 너무 자주 만나고 있어.”

 자량은 이번에도 정확히 알레한드라가 이 만남으로부터 느끼고 있던 감상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었다. 그 탓에 알레한드라는 가장 공손해야 할 순간에도 인상을 찌푸리게 됐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너무 자주 만나고 있고, 양측 누구에게도 달갑지 않은 조우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순전히 자량의 호의에 기대는 형국이었기에, 알레한드라는 번번이 성질을 죽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아냐.”

 펑퍼짐한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자량이 부연했다.

 “알아. 조심하고 있어. 말했잖아.”

 “그걸 어떻게 믿지?”

 “믿을 필요 없어.”

 알레한드라는 그에게 병원의 근태 기록을 복사해 보여 줄 수도 있었다. 혹은 약의 용량과 그것을 소진하기까지의 기간을 계산하여 결백을 호소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예 해명을 거부하기를 택했다. 자량이 거절한다면, 그녀를 포기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끝낼 셈이었다.

 그러나 자량은 한숨을 내쉬고는 뒷덜미를 문지르더니 결국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특징 없는 병은 얼핏 비어 있는 듯 보였다. 코카인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확인하는 바이어처럼 그녀는 병을 받아 흔들었다. 투명한 액체는 곧 반짝이는 금빛으로 물들었다가, 움직임이 잠잠해지면 다시 본래의 무색무취한 상태로 돌아갔다.

 자량은 여전히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무언가를 염려하는 듯했다. 때로는 단순한 걱정을 넘어서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금전이든 무엇이든 돌려받는다면, 그래서 이 선의의 행동이 정말로 정식 거래가 되어 버린다면, 공급자인 그에게도 일종의 채무가 발생하리라고 믿는 것 같았다.

 “캄란에게 안부 전해 줘.”

 “…네가 직접 연락해.”

 자리가 불편해 못 견디겠다는 투로, 적절한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자량은 불시에 떠났다.

 그리고 삶은 이어진다. 파고들어 진정으로 이해해야 했던 결단의 대상도 더는 곁에 존재하지 않기에, 무명의 수면제는 정직하게 잠을 재촉하는 용도로만 소비되었다. 의료진 틈바구니에서 흡연은 양해할 만한 취미였고 마법의 힘을 빌리면 과음한 다음날에도 아무런 여파 없이 멀쩡히 출근할 수 있었지만, 밤과 어둠과 숱한 상념을 견디지 않아도 되게끔 하는 약효는 어떤 중독보다도 유혹적이었다.

 꿈은 다채로웠고 절반 이상은 의식 세계로 건너오며 바스라졌다. 번번이 눈물을 흘리면서 깼기에, 얼마 이후에는 구태여 문질러 닦는 수고도 들이지 않게 되었다.

 환자들은 참을성 있게 처방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비명을 지르고 통증을 호소하고 간호인들에게 발길질을 했다. 치유사들은 신경질적으로 증상을 확인하고 진단을 내리고 또 그 사이사이에 그들 역시 비명을 질렀다. 세뇌에 걸린 동안에는 기이하리만치 고요하고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던 질서가 완전한 혼돈으로 대체되었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갔다. 삶의 주체성을 회복했다. 이제 이 나날이 그들의 정상이었다.

 그런데 알레한드라는 저주의 개체이지 못했다. 상실된 의지가 주는 평온함을 누리지 못했다. 그녀는 망가진 채로, 그 모든 일들을 맨정신으로 감내했고 모든 것이 ‘원상으로 복구’된 뒤에도 그 위력이 자신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지치고 외롭고 혼자였다.

 그녀가 끔찍이도 두려워하던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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